세계의 삼성, 초일류의 삼성을 이끈 이건희의 경영철학

삼성을 초일류로 이끄는 데는 이건희의 역할이 컸다. 그는 누구인가? 위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모험과 도전으로 위기를 극복한 대한민국 최고의 경영자이다. 한때는 편법 승계, 무노조 경영으로 눈총을 받았고, 대선 때마다는 ‘경제민주화’의 표적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삼성이 더욱 애착이 갈 터이다. 기업전문가들이 뽑은 가장 성공한 CEO 1위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남다른 경영철학으로 세계의 삼성, 초일류의 삼성을 만들기까지 그의 경영철학을 들여다보자.

  편법승계·무노조 경영으로 눈총 받은 삼성 대선, 정국에선 '경제민주화' 표적의 대상, 시작은 한국반도체 인수로 시작되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삼성계열 동양방송 이사로 있던 1974년. 이 회장은 파산 위기에 직면한 한국반도체를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살 길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에 뛰어드는 것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삼성전자 경영진은 “TV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에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삼성 밖에서도 “반도체 왕국 일본을 옆에 두고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삼성전자 차원의 인수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결국 그해 12월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후 일본이 6년이나 걸려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만들면서 인수 20년 만인 1993년 삼성전자를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회사로 키워냈다.

이런 집념이 바탕이 된 덕에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이 회장의 꿈은 이뤄졌다. “그의 지식과 통찰력은 곧 실천이며 행동”이라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평가대로 이 회장은 늘 불가능할 것 같았던 목표를 이루고야마는 경영인이었다.

그런 그가 올 1월 신년사에서 내놓은 화두는 ‘국민기업’. 2002년 1월 “삼성은 국민의 기업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국민 기업으로서 더욱 분발하자”고 한 뒤 꼭 10년이 지나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존경받는 기업이 되지는 못했다고 판단해서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할 때부터 “기업은 눈에 안 보이는 책임까지 다해야 한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론은 삼성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李 회장, 1993년 신경영 선언…1200시간 '변화의 필요성' 강의"이러다 삼성 사라질 수 있다"…"우리는 2류다" 위기 강조  '비판 두려워말고 正道 걷자' 등 사원들 의식개혁부터 시작, 보고서없는 회의·열린채용 등 삼성을 바꾼 제도로 정착

“이건희 회장은 무명의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2005년 타임지가 이 회장을 ‘올해의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며 내린 평가다.

삼성이 올해 ‘글로벌 톱 10 브랜드’에 오른 것은 오너인 이 회장이 중심을 잡고 미래를 본 것이 원동력이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이명우 한양대 교수는 “삼성이 지금 위치까지 성장한 배경에는 이 회장의 강력한 오너십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위기론의 확산에 동요하지 않는다

1987년 12월1일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 모인 임직원 앞에 선 46세의 이 회장은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담대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삼성그룹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주로 업무를 보며 ‘은둔의 경영인’으로 불렸다. ‘과연 이건희가 이병철 선대 회장만큼 잘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세간에서 회자됐다.

이 회장의 근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1988년 제2창업을 선언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199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게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임원 교육서인 ‘삼성 신경영’)”

  ‘삼성의 신경영’

신경영은 이 같은 위기의식에서 시작됐다.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회의를 가진 이 회장은 베를린 런던 도쿄 오사카 등 2개월간 해외를 돌며 1800여명의 임원 앞에서 1200시간을 넘게 ‘위기와 변화’를 강조했다. 삼성 변화의 시작이었다.

초일류 기업이 된 지금도 이 회장은 위기를 전파한다. 올 1월엔 미국 가전쇼(CES)를 참관한 뒤 “몇 년 사이에 정신을 안 차리고 있으면 금방 뒤지겠다하는 느낌이 든다”고 강조했다. ‘위기의 경영, 삼성을 공부하다’란 책을 지은 요시카와 료조는 1990년대 삼성에서 10년 동안 상무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가 꼽은 삼성의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이건희의 위기의식이었다.

이 회장의 위기관은 1993년 신경영 선언 때 주창한 ‘메기론’에서 잘 알 수 있다. ‘삼성인의 용어집’이란 내부 교육용 책자에 실린 내용이다. “논에 미꾸라지를 키울 때 한쪽 논에는 미꾸라지만 넣고 다른 한쪽에는 미꾸라지와 메기를 넣어 키우면 어떻게 될까. 메기를 넣어 키운 쪽의 미꾸라지들이 훨씬 더 통통하게 살이 찐다. 메기에게 잡혀 먹지 않으려고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활발히 움직였기 때문에 더 많이 먹고, 더 튼튼해진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

1993년 6월 이 회장에게 비디오테이프 한 개가 전달됐다. 사내방송팀이 만든 세탁기 조립 과정을 담은 영상이었다. 영상엔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의 플라스틱이 맞지 않자 직원들이 2㎜가량을 면도날로 잘라내고 있었다. 뚜껑 부분을 다시 설계하고 생산해야 했지만 직원들은 별 생각 없이 끊임없이 플라스틱을 깎고 있었다. 모두에게 불감증이 만연해 있었다. 1주일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수백여 명의 임원들 앞에선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삼성은 2류다. 그대로 있으면 3, 4류가 되고 망할지도 모른다. 일류가 되기 위한 변화를 본격화하자”고 설득했다.

기업은 모두 변화, 개혁을 부르짖는다. 이 회장이 달랐던 점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의식부터 바꾸자’는 데 있었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이 부르짖는 변화는 일종의 문화혁명 같았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삼성 헌법을 만들어 비판을 두려워 말자. 서로 믿을 수 있을 때 변할 수 있다,

정도를 걷자, 뒷다리를 잡지 말자 등 의식 개혁에 나섰고, ‘한 방향으로 가자’며 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

  7.4제 실시와 학력제한 철폐

1993년 8월엔 전격적으로 ‘7·4제’를 실시했다. 아침 7시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하는 이 제도는 회장의 개혁 철학을 임직원이 체감토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결제 프로세스도 7~8단계에서 3단계로 줄었고, 보고서 없는 회의문화도 만들었다.

1995년 공채에서는 파격적으로 학력 제한을 철폐했다. 또 성차별 해소를 위해 여사원 근무복을 없앴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연봉제를 실시했다. 1994년 말 문을 연 삼성의료원은 한국의 영안실 문화를 확 바꿨다. 이 같은 변화는 재계로 확산됐다. 삼성 관계자는 “급변하는 IT 산업에서 선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직원들이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바뀐 덕분”이라고 설명했다.